기획/특집

[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필라델피아 신재철

[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필라델피아 신재철


무카스와 인터뷰 중인 신재철 회장.

태권도가 정착되기 전에 한국을 떠나왔다는 신재철 세계당수도연맹 회장. 무덕관의 황기 관장으로부터 배운 당수도(唐手道)를 그는 버리지 않았다. 갈수록 스포츠화 되어가는 태권도를 보면서 자신만큼은 무도 정신을 꼭 지켜내고 싶다고 하는 그다.

‘당수도=신재철’의 등식 때문인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도 소외받아왔고, 고집불통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1970년 미국 이민 이후, 현재 세계 33개국 30,000여명의 제자를 키워낸 그의 별명은 ‘원 모어 타임(one more time)’. 세계 각국을 누비며 직접 사범 교육을 하는 ‘현역 신재철’에게 제자들이 붙여준 닉네임이다. 필라델피아 델러웨이의 한 도장에서 그를 만났다.

- 처음 당수도를 시작하던 수련생 신재철로 되돌아 가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도장이라는 것이 없었죠. 길거리에 모여 여러명이 운동을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후 중고등학교 때부터 무덕관의 황기 관장님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웠죠. 황기 관장님은 인자하고 좋은 분이셨습니다. 인천 터미널의 역 근처의 아주 허름한 건물 도장에서 당수도를 시작했습니다. 3개월 정도는 물 떠오고 선배들 모시느라 정신없었죠. 과거 도장에서의 운동이란 것이 그랬답니다. 당시에 운동하는 사람은 깡패라는 이미지가 강했죠. 아내와 결혼도 못할 뻔 했습니다. 반대가 심했거든요. 결혼식 당일날 장인, 장모님께 연락을 드려 결혼식 장소를 알렸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수도인 신채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 미국행, 그리고 정착 과정은?

“1968년도였습니다. 결혼한지가 6개월밖에 안됐을 때였죠. 당시 500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는 버링톤의 뉴저지에 있는 한 당수도 도장을 잠시 맡았던 것이 미국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6개월만 있자던 처음의 다짐이, 1년만, 2년만 더 하다가 영영 있게 된 것이죠. 당시 미국에 와보니 한국의 무술은 없었습니다. 고 이행웅 회장과 준리 사범이 미국에서 도장을 개관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죠. 아시다시피 미국 사범 생활은 외롭고 고단했습니다. 초기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수련생을 죽도로 엉덩이를 때려서 시꺼멓게 멍을 내기도 했죠. 이게 큰 문제가 되어서 주 정부 교육위원회까지 출석해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쫓겨날 뻔했죠(웃음).”


신재철 회장이 제자 도장을 방문해 사범들을 격려하고 있다


- 미국에 당수도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당시 미국 사람들은 사범에게 도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프로레슬링을 한 사람이찾아왔습니다. 정말 난처한 것이 수업 시간에 찾아오는 도전자들이었죠. 저보다 두 배 이상의 체격차이였습니다. 다짜고짜 ‘마스터 신 어딨냐, 도전하러왔다’고 하더군요. 밑에 사범이라도 있었다면 먼저 제자부터 꺾고 다시 오라고 할 텐데, 그날따라 유단자가 안보이더군요. 저를 보호해줄 누구도 없는 아주 난처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자기를 때려눕힐 수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이건 때려도 문제, 안 때려도 문제였죠. 죽어도 좋고, 다쳐도 좋다는 서약서까지 받았습니다. 사인까지 했죠. 이정도면 물러설만도 한데, 그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그가 레슬링 자세가 아닌 기마자세로 제 앞에 선 것이죠. 그래서 냅다 앞차기로 낭심을 찼습니다. ‘헉’하며 움츠린 그의 명치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서 주먹을 내질렀습니다. 공중에 붕 뜰 정도의 충격이었죠.수련생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는 한 10여분 동안 누워있었죠.”

올해로 미국에 온지 43년차, 그의 지금 명함은 세계당수도연맹 신재철 회장으로 바뀌었다. 현재 연맹 소속 유단자만 40,000명. 아직도 그는 본인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쳐야 직성이 풀린다는 ‘현역 사범’신재철이다.

- 당수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아주 간단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 당수도이기 때문이죠. 태권도라는 이름이 통용되기 이전에 당수도를 수련했고, 미국에 온 것입니다. 스승이 가르친 무술, 그것을 가르치는 신재철이라고 하면 답이 될까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권도에 대한 뚜렷한 이미지가 없었죠. 중요한 것은 태권도는 도도 아니고 스포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무술이란 것이 편리한 데로 그때마다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직접 시연을 보이는 신재철 회장

- 당수도를 고수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왜 당수도를 고집하느냐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도 명칭 때문에 저를 등한시하는 경향도 있었죠. 많은 태권도 원로들과 지인들도 저에게 태권도를 사용하는게 어떠냐는 권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수도에 대한 애착이 강해, 쉽지 않았습니다. 간혹 ‘당수도하는 사람에게 왜 그러느냐’며 웃어넘기곤 합니다.”

오늘의 시각에서 신재철 총재는 분명 태권도인이다. 하지만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신 총재를 바라본다면? 분명 그는 당수도인이다. 다수의 태권도인이 ‘왜, 당수도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면, 그의 대답은 항상 한결같았다고 한다. “스승으로부터 제가 배운 건 당수도였습니다.”

- 당신의 지도철학은 무엇입니까?

“무도입니다. 당수도에는 무도 정신이 살아있습니다. 고 이행웅 ATA 회장도 같은 생각이었죠. 태권도에는 이 무도정신이란 것이 부족해보입니다. 무술의 진수는 양생에 있습니다. 남을 제압하는 데 있지 목적을 두어서는 안되죠.”

신재철 회장은 아직도 자신의 회원 도장 수련생들에게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암기시킨다고 한다. 인의예지신을 중시하고, 단증 획득을 위해서는 10시간이 넘는 사회봉사 증명서를 제출해야하는 원칙도 세웠다. 40년 넘게 무술이 인간 완성의 기능을 중시해야한다는 지론을 그는 지금도 고수한다.

신재철 회장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아직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에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중도 포기해야했던 대학원 공부를 마저 끝내고 싶어요.”

뉴욕의 권재화, 조시학 원로들의 이야기는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도착한 뒤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댓글 2

한국사범 2010.07.31
무도에 대한 철학과 신념을 지키면서도 저렇게 도장 운영도 잘 하 시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합니다. 도장경영이라는 것이 얄팍한 기술이 아니라, 진정한 무도인의, 스승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진정한 무인으로서의 삶의 가치추구가 결국 성공적인 도장 운영의 지름길이 아닐까요?
존경스럽습니다 2010.07.31
무카스에서이런세계적인프로젝트를추진해주어감사합니다많은걸깨닫고갑니다감사합니다정말이글써준기자님께도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