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오클라호마 잭황
![[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오클라호마 잭황](https://mookas.com/webzine_img0/con_img/news_image/hsadfasfa.jpg)
오전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도장을 찾는다. 저녁 늦게까지 도복 입은 수련생들을 보며 종일을 보낸다. 수련시간에 맞춰 그를 찾는 수련생들을 향해 “How are you, good”이라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인 원로 태권도인. 그에게 찾아든 세 번의 교통사고. 왼 다리와 오른 팔 신경을 잃어버리면서 좌절했던 지난 삶. 2010년 7월 20일 현재. 지팡이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는 미국 태권도사를 기술함에 있어 지울 수 없는 ‘콧수염’ 잭황(80, 한국명 황세진)이다. 20일 오전 미국 오클라호마 ‘잭황 마샬아츠’를 찾은 무카스 미국 특별취재팀이 낡은 사진 속에서의 그를 만나보았다.
- 제자들과 함께 땀흘리지 못해 아쉬움이 클것 같습니다.“이렇게라도 제자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것이죠. 불편한 몸으로 이 정도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봅니다.”
20일 새벽 2시. 오클라호마시티에 도착한 특별취재팀을 맞은 건 잭황 본인이었다. 거동이 불편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점점 감각을 잃어가는 다리 탓에 차 문 밖을 나서 악수를 청하기란 여간 쉽지 힘든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보냈어도 충분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행여 길을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전화기를 붙들고 새벽을 기다렸다.
- 태권도인 잭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본인을 소개한다면.
“워낙에 남과 겨루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경기인 잭황이라고들 하는데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시합에 나서면 지지 말아야겠다는 오기와 끈기가 있었던 것이죠. 더 큰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다른 나라의 선수들과 싸워 지고싶지 않았던 저의 의지였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저에게 우리나라의 문화와 한국 사람의 정신을 미국인들에게 가르치라고 당부하셨죠. 그렇게 되면 미국 내에서 존경받을 것이라고 하시면서요, 처음엔 엄청 반대를 하셨습니다. 아주 오래전, 오랜만에 만난 제가 콧수염을 기른 상태로 만나자, 당장에 깎고 오라는 불호령을 내리셨죠. 그런 강직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부전자전이겠지요. 제 삶 전부는 태권도를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신을 전파하고 미국사회에 일조하는데 바쳤습니다.”
잭황 사범은 1931년 7월 진주에서 자라, 1956년 군 제대 이후 이듬해인 1957년 미국에 왔다. 처음 길바닥에서 싸움을 또 무술을 연습했다고 한다. 1964년부터 46년간 태권도만 가르쳤다. 지금은 좌석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범들을 대상으로 구두로만 지도하고 있다. 잭황 사범의 아들은 현재 전 미국을 돌며 무술을 배우고 있다. 향후 태권도 하나만을 가지고는 절대 미국 수련생들을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잭황 사범의 지론 때문이다. 하나의 무술만으로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고 그는 늘 강조한다.

잭황 사범이 정신교육을 마치고 제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고 있다.
- 지우고 싶은 사고의 기억,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30여년 전 일어난 처음의 교통사고는 심각하지 않았다. 발목을 심하게 다쳤던 것 빼고는 괜찮았다. 두 번째 교통사고는 4년 전 고속도로에서 일어났다. 마약에 완전히 취한 출소한지 몇 일 되지 않은 흑인이 운전하는 차량과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덩치의 남자였다. 내 차의 에어백이 터지면서 연기가 나왔는데, 차에 불이 난 줄 알았다. 병원에 가보니, 허리 신경이 눌렸다고 해, 수술을 받았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알 수 없는 통증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세 번째 사고는 국도에서 큰 밴과 나의 승용차가 정면충돌하면서 발생했다. 병원 주치의로부터 척추 뒤도 지나가는 중요 신경이 손상됐다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엄청난 고민을 해야했다. 자칫 수술 이후 회복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인생에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었습니다. 수술 대신 재활을 택해야했는데.”
잭황 사범의 일과는 오전 10시에 도장에 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동이 불편한 까닭에 수분섭취를 최대한 제한한 식사를 한다. 죽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살고 싶었다는 잭황. 점점 말을 듣지 않는 약해지는 몸을 보며 “사람이 사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점점 말라가는 나무처럼 보이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 '태권도 원로' 잭황의 초기 미국 정착을 간략하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유학생 신분으로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미국 사람이 운영하는 도장에서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았습니다. 이후 저의 개인 도장을 오클라호마시티에 개관했습니다. 당시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도장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이후에 후배들의 미국 진출을 돕기 시작했죠. 조수세, 문대원 등의 실력자들도 이 시기에 미국에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1964년 여름, 잭황 사범은 오클라호마시티에 태권도장을 개관했다(당시는 미국 사람들에게 가라테 도장이 잘 알려진 때라 간판은 코리언가라테였다). 잭황 사범이 미국 정착 이후 배출해낸 제자만 해도 줄잡아 20,000여명. 오클라호마대학, 랭스턴대학, 오클라호마밥티스트대학, 그레고리대학 등지와 정부 기관 등지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며 오클라호마 내에서 그랜드마스터로의 입지를 넓혀갔다.
- 태권도인들이 잭황 하면 가장 먼저 겨루기를 떠올립니다.
“1960년대 중후반, 가라테, 코리언가라테, 쿵푸등이 모여 겨루는 전미무술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온 저는 예선부터 커다란 미국인들과 실력자들을 넉다운 시킨 관심의 대상이었죠. 미국 선수들의 체력은 상상이상이었습니다. 고기 먹고 자란 사람들이라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날 저는 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기대 이상의 선전이었죠. 한국인 최초로 미국인들과 일본의 가라테 고수들과의 경기에서 그런 성적을 거두기란 처음이었죠. 준우승이었습니다.”
미국 전국대회 최초의 결승진출자, 잭황 사범이 말하는 겨루기의 중요 포인트는 무엇일까. 잭황 사범의 말. “경기에 임할 때마다 저는 독사를 떠올렸습니다. 쉽죠. 한 번 공격으로 상대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입니다.” 잭황 사범의 주특기는 ‘뒤차기’였다고 한다. 당시 상대를 다운시킨 대부분의 기술이 이 회전 공격에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잭황 사범의 한 마디, “미국의 덩치들을 상대하려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한 방’ 피니시 기술이었죠.”

트로피와 명함
- 경기에 출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당시 규정이라는 것이 낭심을 차면 안됐습니다. 상대 얼굴을 공격해서 피를 과도하게 흘리게 해서도 안된다는 등의 제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결승전이었죠. 심판들이 마치 담합이라도 한 듯, 상대의 점수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깃발은 연신 올라가고 저는 아무리 차도 점수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봉의 차별이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억울해 엎어버리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요. 엄청 심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잭황 사범은 1973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미국 대표팀 단장으로 참석했다. 당시 미국은 2위를 차지했다. 이후 오클라호마 주정부로부터 공로표창을 받고, 미국 마샬아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각종 시범을 통해 장애우들의 모금 행사에도 앞장서왔다.
- 실제 수업을 이끌지 못하는 데도 수련생이 상당합니다.
“지금까지 40년 넘도록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수십명에 달합니다. 바로 이들이 저희 도장의 사범들이죠. ”
잭황 사범의 1기 제자. 톰 푸켓(남,Tom Puckettt)은 올해로 45년 동안 그에게 태권도를 배워왔다. 목사가 된 이후에도 도장을 찾는 푸켓은 “항상 배움을 주는 나의 마스터이다. 그와 함께한 지난 시간이 나에겐 오히려 영광”이라고 말한다.
비록 몸은 힘들지만 잭황 사범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도장에서 태권도를 또 제자들을 보고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단다. 그러면서 무도인 답지 않은 못내 이룬 한 가지 꿈에 대해 말한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꼭 해보고 싶어요. 다리가 없어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잖아요. 한 손이 망가져도 다른 한 손이 나를 표현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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