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KAS IN USA] '도복 입은 무술 연구가’ 김희영의 삶
![[MOOKAS IN USA] '도복 입은 무술 연구가’ 김희영의 삶](https://mookas.com/webzine_img0/con_img/news_image/hasdasd.gif)
'도복 입은 무술 연구가’라는 수식어는 김희영(72)을 표현하는 함축어이다. 19일 뉴올리언스 배튼루지 중심가에 위치한 한무도 총본관. 특별취재팀이 방문한 이날에도 김희영 세계한무도연맹 총재는 어김없이 띠를 조여 맸다. 고희(古稀)를 넘어서는 나이에 이제 조금은 쉬어갈만도한데 흠뻑 젖은 도복이 무도인 김희영의 외고집을 대변한다. 1962년부터 모은 세계 각지의 무술 자료는 10평 남짓한 세 곳의 집무실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통로 곳곳에 탑처럼 쌓여있다. 한국에서는 ‘역사학 박사 김희영’으로도 친숙한 그가 미국에서는 ‘한무도 창시자 김희영’으로 존경받고있다. 한무도 총재의 일상이란 것을 ‘집과 도장’이라고 너무도 쉽게 말하는 그는 마흔 다섯 장남 도널드 킴의 존경 받는 아버지이기도하다.

17일 개인 도서관에서 인터뷰 중인 김희영 박사
- 당신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무술 역사 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릅니다.“루이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끝마쳤을 때였습니다. 당시는 무술을 공부하겠다는 계획이 없었죠. 무술 역사에 관해서는 지도교수의 제안이 컸습니다. 역사(히스토리)라는 것이 군대의 변천과 성격을 같이 한다는 의미를 주셨죠. 1963년도 입학 당시까지만 해도 전공이 외교사였습니다. 확 바뀌었던 것이죠. 제가 이 역사라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의 공론화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1956년 이후에 흑인의 인권 운동이 흑인 역사가들로부터 많이 나왔습니다. 서부 활극을 보면 전부 백인 중심이었죠. 하지만 대중은 흑인 카우보이의 존재에 관해 잘 모릅니다. 바로 그것에서 이 역사 공부의 매력에 빠진 것이죠.”
김희영 박사의 집무실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세계 무술 자료들이 수집되어 있다. 제자들과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 역시 이곳을 ‘라이브러리(도서관)’라고 부른다. 자택과 한무도 총본관에 3개의 장소에 개인 도서관이 있으며, 각 무술 종목, 단체, 인물, 연도별로 꼼꼼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 어마어마한 양의 무술 자료들입니다.
“1962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중 태권도에 관한 자료가 상당수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원로 태권도인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분들도 계시구요. 이 인터뷰는 1970년대부터 시작했습니다.”
김희영 박사는 합기도, 유도, 태권도 등의 다양한 무술을 성심을 다해 수련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분야의 무술을 수련하는 친구, 선배들을 접할 수 있었으며 이는 김 총재가 무술 역사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시간,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인터뷰 당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었나요
“이원국 원로의 경우는 굉장한 기억력을 보였습니다.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포토그래픽 메모리(사진기)’였죠. 1년 뒤에 똑같은 질문을 해도 동일한 답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특출했죠. 태권도 사진들도 많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아참, 자료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죠. 바로 최홍희 장군입니다. 가장 많은 사진을 가지고 계셨죠. 연대별 각 나라별로 정리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전문 사진사를 데려가 3회 정도를 찍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이 대부분의 자료가 북한의 태권도전당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이 한국에서 훈장을 받은 것 만큼은 북한에 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부 자료들이 캐나다에 있습니다.”
김희영 총재의 도서관에는 무카스 취재진이 익히 알고 있는 원로 태권도인들의 1950년, 60년대 때부터의 태권도 사진들이 수합되어 있었다. 미국 태권도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블랙벨트 매거진은 1회분부터 소장하고 있다. 김 총재는 “미국의 태권도와 가라테 보급의 변천사를 한눈에 알게 해주는 자료”라고 말한다.

김희영 박사의 오래된 도복
- 미국 태권도계의 역사를 무술연구가 김희영으로부터 들어보고 싶습니다.“50년대에는 유도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YMCA나 학교, 도장 등지에서 동양의 사범들을 불러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등지의 유도가들이 미국 땅을 밟기 시작했죠. 이런 중에 미국 캘리포니아 본토에서까지도 옛 구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부터 태권도 보급의 또 다른 발판이 시작됐습니다. 소련에 폭탄을 떨어트리고 돌아올 수 없는 확률이 점점 커지자 적지에 떨어지는 군인들의 자기방어 수단이 필요해진 것이죠. 권총이나 무기들이 아닌 호신술이 필요했습니다. 이때부터 미군은 군인들의 생존을 위해 강도관(일본유도관)에 파일럿들을 보내 훈련시켰습니다. 때문에 어느 공군기지와 육군기지에 가도 가라테, 유도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민간에도 전이되었습니다. YMCA에서도 가라테 수련 등이 가능하게 되었죠. 이는 미군 부대에 유도와 가라테 스쿨을 태동시켰습니다. 60년대에는 가라테가 상당히 성행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유학생들과 유도를 가르치러 온 사람들, 처음부터 당수나 공수도를 가르치러 온 사람들 그리고 가라테 이 세 부류가 모여 미국 무술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60년대 한국 전쟁을 겪은 군인들과 베트남 전쟁에서 귀국한 군인들로 미국 내 무술인들의 수와 관심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가라테, 코리언가라테, 쿵푸 세 가지는 미국 땅에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 당신이 생각하는 미국 태권도 보급의 일등공신은 누구입니까?
“초기 보급에 있어 공로자를 뽑으라면 우선 세 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준구 사범이 최초 1956년에 미국 동부에 왔습니다. 이후 잠시 출국해 6개월 뒤 다시 미국을 찾았습니다. 이때 이준구 사범이 처음으로 유학생 신분으로 코리언가라테를 가르쳤죠. 같은 해에 잭황(황세진) 사범이 유학생으로 중남부에 와서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62년에 헨리조(조시학)가 같은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서 태권도를 보급했습니다. 준리는 미국 최초의 사범으로, 잭황은 한국인 최초로 전미오픈토너먼트에서 결승까지 오르며 위상을 높였죠. 헨리조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에서 1965년 2월에 전美무술대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는 최초의 사범, 경기인, 대회개최의 주역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당시 일본 가라테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일본 가라테가 그렇게 성행하지 못한 이유도 일본 선수들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기규칙이 달랐습니다. 일본 오키나와 가라테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을 사용해 이뤄지던 경기 패턴이 발 중심으로 변하면서 미국 내에서 가라테의 자리는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미국인들은 체격에 맞는 기술을 개발해냈습니다. 다행히도 한국인 사범들은 일본 가라테의 기술을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호재로 작용했죠.”
김희영 박사가 털어놓는 한국사범들의 미국 태권도 진출사는 듣는 내내 재미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각 인물들의 개인사와 왜, 그런 상황이 닥쳤는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

18일 김희영 박사가 한무도 총본관에서 수련하고 있다
- 무술인 김희영에 대해 묻고 싶다. 당신이 총재로 있는 한무도의 철학은 무엇인가요?
“한무도란 한국의 무도를 뜻합니다. 언어도 사상도 모두 이 한무도에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중국말로 쓰는 무술이라면 중국의 무예인 것이죠. 저는 도복에 한글로 ‘한무도’를 크게 새겨 넣었습니다. 한무도는 자신을 완성된 인간으로 만든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무도를 통해 자신을 완성한다는 것이죠. 한 이라는 의미를 보면은 징키스칸을 표현하는 높다의 한과, 한강을 말하는 넓다의 한, 대한민국의 밝음을 의미하는 한,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 ‘조신-조식-조심’의 세 박자가 더해져야한다. 몸과 호흡과 마음을 조절해야한다는 것입니다.”
- 고희의 나이를 넘겼다. 현역에서 은퇴를 고려해봄직도 한데요.
“아직도 저는 신체적으로 낙법도 가능하다. 매일 1시간 이상의 수련을 소화해 낼 체력이 있다. 은퇴라는 말이 무술인에게 어울리는 말인가?”
한무도는 세계 20개국에서 3,500여명 이상의 수련생을 확보하고 있으며, 총본관에는 40명이 넘는 제자들이 아직도 김희영 총재와 살을 부딪히며 수련하고 있다.
- 상당수의 제자들이 김희영이라는 사람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공존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정직을 바탕으로 서로 간에 마음이 통해야하는 것이다. 바튼루즈에서만 40년을 보내면서도 물질 앞에 나약해 지지 않았다. 서로 같은 생각 즉, 우리에게는 교감이 있었다.”
끝으로 김희영 총재에게 재밌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죽기전에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저는 정신적인 면에서 아직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책이 끝나면 선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자신을 닦는 생활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신을 의지하기 전에 나 자신을 알고 싶은 작은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남의 것을 가져오고, 보관하고 또 연구했습니다. 이제는 대상을 바꾸어 보고 싶습니다. 인간 김희영으로 말이죠.”
한무도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http://www.hanmudo.com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댓글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