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나라와 함께 죽어 산 인물-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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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계백(階伯,?~660)은 백제의 장군이다. 의자왕 20년(660)에 신라와 당 연합군이 탄현을 넘어 백제를 공격해 들어오자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계백은 전쟁에 앞서 조국의 멸망을 예감했는지 자신의 처와 자식들을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 하여 자신의 손으로 죽인 뒤 결전에 임했다. 3천의 군사로 10배가 넘는 3만의 적을 맞아 4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결국 수적 열세를 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그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한 충신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에 나선 점에 대해서는 보는 입장에 따라 약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과 같은 상황에서 전장에 나갈 수밖에 없는 가장으로서의 입장과 한 나라의 장군으로서의 입장에서 오는 고뇌를 느끼게 한다.
백제의 마지막을 같이 한 계백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많이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에는 계백이 벼슬에 나아가 2품의 ‘달솔(達率)’에 이르렀다고 하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3품의 은솔(恩率)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계가 어떠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고종(高宗) 2년(1865)에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계백에 대해, ‘이름은 승(升)이며 백제동성(百濟同姓)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왕실의 성이 ‘부여’씨이므로 그도 부여씨인 것으로 여겨진다. 단재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부여계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름이 승(升)이라고 하는 부분은 ‘계백’이라는 이름이 갖는 뜻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계백의 ‘계’는 사서에 ‘해(偕)’‘계(堦)’로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한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말 이름을 한자를 이용해 표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음만으로 보면, ‘계’와 ‘해’는 태양을 뜻하는 우리말 ‘해’로 보인다. 그리고 ‘백’은 백제어에서 ‘백(白)’과 같이 쓰이는데, ‘백(白)’은 ‘새롭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계백’ 혹은 ‘해백’은 ‘새 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동지지에 한자로 ‘승(升)’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점도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승(升)’은 ‘해가 떠오르다’는 뜻을 담고 있는 ‘승(昇)’과 통용되는 것이다. 즉 ‘계백’ 혹은 ‘해백’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자를 이용해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계백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고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 대부분은 황산벌 싸움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출생에 관련된 기록은 정사라고 하는 역사서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만 1928년에 당시 군수였던 홍한표(洪漢杓)가 편찬한 부여지(扶餘誌)를 통해 조그만 단서나마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부여지에는 ‘팔충면(八忠面)은 부여군 서쪽 20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하기를,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계백 등 8인이 여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하여 지금의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를 그의 태생지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충화면 천당리에는 계백 장군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갈 때 고향이란 표를 하였다고 하여 ‘표뜸[標村]’이라고도 불리는 상천(上天)마을이 있으며, 천등산(天燈山) 마루 동북쪽 정상에는 계백이 수련을 했다는 토굴터와 수련하면서 물을 먹었다는 백충대 우물터가 남아 있다. 이 우물터는 천등산 건물지로도 불리는데, 이곳은 계백의 어머니가 유복자인 계백을 낳을 때 난산으로 실신하자, 호랑이가 이 우물 근처 석실로 물어와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계백이 천등산을 오르내릴 때에는 해묵은 왕솔이 갈대 넘어지듯 했으며, 수련할 때 바위를 디딘 곳에 자국이 생겼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등 계백과 관련된 전설들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이 계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이야기의 내용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이 제한되어 있는 고대 사회에서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천한 계급이었다면, 백제 16관등 중에 제2등인 달솔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계백의 집안은 부모대 혹은 그 이전에 몰락한 귀족 계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계백을 포함한 성충과 흥수 등은 의자왕이 왕위에 즉위한 이후, 기존의 귀족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발탁한 인재들로 여겨진다.

삼강행실도 중 계백오전
계백의 무예수련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부여의 충화에서 태어난 계백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계백은 낮에는 백충(百忠)재와 천등산을 달려 오르내리며 무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글을 읽었다. 백충재는 천당리(天堂里)에서 청남리(靑南里)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제의 충신들이 넘나들던 곳이라 하여 백충재라 불린다고 한다. 하루는 계백의 어머니가 아들의 무술공부에 큰 과제를 주었다. 그것은 백충재에서 천등산 마루의 과녁판을 향하여 활을 쏘고 그 화살보다 빨리 달려가서 화살이 과녁에 꼽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벼슬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계백은 어머니의 명을 쫓아 매일같이 활쏘기를 익혔다. 그는 활을 쏜 후, 재빨리 말을 달려 천등산에 올랐으나 화살보다 빨리 갈 수는 없었다. 고심을 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그의 말을 물어 죽이고는 자기 등에 탈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계백은 호랑이의 등에 앉아 천등산 마루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호랑이가 순식간에 달려서 과녁판에 이른 것이다. 화살은 그 후에야 명중되었다. 호랑이가 바로 나는 호랑이 ‘비호(飛虎)’였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 소실된 가림방동고(嘉林坊洞考)를 참고하면, 계백의 체계적인 무예 수련은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支石里)와 서천군 마산면 나궁리(羅弓里) 사이를 가로막아선 노고산(老姑山)에서 이루어진 듯하다.
노고산 동남쪽 골짜기에 절이 있는데, 범황사(梵皇寺)라 한다. 절의 승려 혜오화상(慧悟和尙)이 차력(借力)과 둔신술(遁身術)을 알았다. 여러 승려와 더불어 노고산 석굴 중에서 도(道)를 수련하였다. 성충계백 흥수(興首)도 또한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배우는데 참여하였다.
노고산은 꼬부랑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부여군 25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고 산의 굽이진 형태가 마치 노인의 등 같이 생긴 것 같아서 그렇게 불린다. 노고산이란 명칭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이 노고산에 백제시대에 범황사가 있었으며, 계백은 그 절의 승려 혜오화상에게서 여러 스님들 그리고 삼충신의 일원인 성충 흥수와 더불어 차력과 둔신술을 배웠다고 한다. 계백은 혜오화상에게 무예를 배우고 천등산 등에서 수련을 이은 이후 관직에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도 이야기가 전한다.
충남 부여에 있는 백제의 궁성에서 의자왕이 밤마다 서편 하늘에 매달린 듯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이상히 여기다가 하루는 신하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가 말을 달려 천등산에 이르러 등불이 반짝이는 곳을 향하여 올라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건장하고 잘 생긴 장사 한사람이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를 옆에 데리고 앉아서 열심히 글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의자왕은 곧 이 장사를 조정에 불러 장군을 삼았다고 한다(계백과 관련한 전설은 임병고, 「계백장군 전설지 답사 및 상황리 왕총에 관한 고찰」 한국학논집, 1986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의자왕 원년(641)과 2년(642)에 가금성주(椵岑城主)에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계백 등이 혜오화상에게 배운 차력의 기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식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다는 장수 발자국 바위 또는 왕솔 등이 갈대 넘어지듯 했다고 하는 이야기 등과 같이 보면, 맨손무예에 능숙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백제의 맨손무예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무인 형상을 통해,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 2년(642)에 백제의 대좌평 지적(智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상박(相撲) 즉, 스모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혹시 백제의 무예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 본다.
둔신술은 말 그대로 몸을 숨기는 기법으로 여겨진다. 둔신술은 마음대로 자기 몸을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게 하는 기문둔갑을 떠올리게 되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적의 감시망으로부터 몸을 숨기며 첩보활동을 하거나 적을 암살하는 등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앞서 비호 등에 타고 활쏘기를 했다는 전설을 통해 계백이 말타기와 활쏘기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계백의 무예 솜씨가 전반적으로 뛰어났던 것으로 봐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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