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용인대 학생들이 손 맞잡던 날

마침 4월 19일이었다. 경희대와 용인대 태권도학과 학생들은 태권도 역사책에 한 획을 긋는 공동 투쟁을 벌였다. 19일 오후 2시 30분 경희대 학생들이 먼저 대한태권도협회 임원들의 저지를 뚫고 국기원 코트로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된 이날의 공동 투쟁은 10분 후 용인대 학생들의 합류로 이어졌고 한 시간에 걸친 코트 위 농성으로 전개됐다.
이날 경희대와 용인대 학생들의 공동 투쟁은 대한태권도협회 측에서 성의 있는 태도를 보였다면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경희대 학생들이 대회 첫날과 셋째날 용인대 학생들의 투쟁 소식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도 대한태권도협회의 대응에 따라 만일의 경우 시위를 벌일 준비를 하고 이날 국기원에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협회 측의 설득력 있는 답변이 있을 경우 대화로 해결한다는 유연한 입장이었다. 실제 이날 오후 2시 15분경까지도 경희대 태권도학과 이동찬 학생회장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희대 태권도학과 이동찬 학생회장과 용인대 태권도학과 윤승훈 학생회장은 학생 대표 자격으로 오후 1시 50분경 송봉섭 대태협 행정 담당 부회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송 부회장에게 오심 판결 책임 심판 징계를 골자로 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다시 한번 요구했고 송 부회장은 협회 규정에 따라 기술심의회 회의 등을 3주 내에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대답했다.(이하 대화 요지)
경희대 이동찬: 언제까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공개적으로 언급해달라.
송봉섭 부회장: 2주안에 회의가 열리지 않겠나.
경희대 이동찬: 확답을 해달라.
송봉섭 부회장: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내가 들어봐야 한다. 개인 의견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용인대 윤승훈: 소청이 제기된 상태에서 경기를 진행한 문제에 대해서 말해달라.
송봉섭 부회장: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문책이 있겠지. 개인 소견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경희대 이동찬: 언제까지 조치할 것인가?
송봉섭 부회장: 2주 정도 걸린다. 상임이사회에서 결정해야 하는데 그 전에 여러 절차가 있다. 기술심의회에서 검토하고 법제 상벌위원회에서 검토한 후 상임이사회가 최종 결정을 한다.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회의를 여러번 거친다.
경희대 이동찬: 잘못이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문책하는가?
송봉섭 부회장: 내 소견으로는 당연히 문책이 따라야 한다. 나는 경기를 보지 않았다. 말로만 들었다. 나는 행정 담당 부회장이라 자세한 것은 모른다. 자세한 것은 기술 담당 부회장하고 얘기해봐야 한다.
용인대 윤승훈: 처벌을 확실히 하겠다는 말인가?
송봉섭 부회장: 잘못이 있는 사람은 문책해야 한다. 확실히 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들이 징계를 요구하는 심판들이 오심을 했다는 판단을 이미 전제하고 언제 어떻게 징계를 할 것인지를 협회 측에 밝혀달라는 것이었던 반면에 송 부회장의 답변은 해당 심판이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검토하고 잘못이 있으면 징계하겠다는 다분히 원론적인 것이었다.
이에 두 학교의 학생회장과 몇몇 학생은 송 부회장의 답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잠시 회의를 가지고 2시 15분경 고심하던 경희대 이동찬 태권도학과 학생회장이 내려갑시다(코트로)라고 말했고 이로써 두 학교의 공동 투쟁은 결정됐다. 이때 이동찬 학생회장의 얼굴은 사뭇 비장했다.
2시 30분 이동찬 학생회장을 선두로 경희대 130여명의 학생들은 본부석 왼쪽 입구를 통해 경기장 진입을 시도했고 이에 협회 임원들은 학생들을 힘으로 밀어내고 셔터 문을 내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잠시 후 경희대 학생들이 관중석에서 경기장으로 직접 뛰어내리기 시작하면서 무력해졌다.
이때 몇몇 임원들이 이동찬 회장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하기도 했으나 경기장은 곧 경희대 학생들에 의해 점거됐다. 이때 관중석에서 보고 있던 용인대 학생들은 이들을 박수로 격려했다.
곧이어 용인대 학생들도 경희대 학생들의 대열에 합세했고 경희대 태권도학과 이동찬 학생회장은 규정에 의한 공정한 심판 판정 등 우리의 입장을 낭독했고 "뻔뻔한 심판 판정 이제는 신물난다", "태권도 종주국 위상은 어디로 갔나? 우리는 깨끗한 태권도를 원한다" 등의 구호를 선창했다. 이에 학생들은 구호를 따라 외쳤다.
이어 농성은 이동찬 학생회장과 윤승훈 용인대 태권도학과 학생회장이 번갈아가며 연설과 구호를 제창하는 식으로 진행됐고 몇몇 학생들이 임시연단으로 마련된 의자 위에 올라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어떤 학생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다른 대학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태권도계가 얼마나 병들었는지에 대해 말했다.
용인대 윤승훈 학생회장은 교수들도 학생들에게 공개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수들이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만 가르쳤지 이런 태권도계의 썩은 현실을 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냐고 말했다.

2시 50분 협회는 학생들에게 협회의 입장을 밝혔으나 이는 야유만 샀다. 한 시간 내에 학생들이 농성을 풀지 않을 경우 잔여 경기는 무기한 연기하고 2001년 동아시안 게임에 내보낼 선수들은 협회 기술심의회에서 검토하고 상임이사회에서 선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각 방송국과 신문사에서도 이날 사태를 매우 밀도 있게 취재했다. KBS와 MBC, 경인방송은 오전부터 나와 상황을 취재하고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은 학생대표와 협회 임원들, 여러 인사들을 인터뷰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학생들은 3시 40분 "우리가 알려야 할 것을 충분히 알렸다. 협회 측에 다시한번 답변할 기회를 주겠다"고 선언하고 두 학교 학생회장이 관중석 앞을 돌며 다른 관중들에게 경기를 지연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농성을 마감했다. 협회 측이 잔여 경기를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공표한 시간 10분 전에 코트를 협회 측에 내줌으로써 협회 측이 자신들에게 대회 파행의 책임을 지울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조치로 보였다.
이날 두 학교 학생들이 벌인 공동 투쟁은 상당히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장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두 학교 태권도학과 학생들이 태권도계의 잘못된 관행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하나의 대열을 형성한 것이다.
이는 앞으로 대한태권도협회가 끌어안고 다닐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한번 자신들의 힘을 확인했고 두 학교 학생들이 힘을 합해 투쟁한 경험을 쌓음으로써 이후 태권도계가 안고 있는 각종 모순이 드러날 때마다 이들은 행동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로서는 학부모들과 일부 교수들, 감독들로부터도 심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두 학교 학생들의 투쟁에 대해 많은 학부모들이 박수를 보냈고 다른 학생들도 "처지가 달라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저들의 주장에 공감한다"고 말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이들 학생들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다. 이들이 과연 이런 여세를 몰아 앞으로 있을 각종 태권도대회에서 얼마나 심판 판정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2001년 4월 19일 이날이 태권도 역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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