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 절망에서 빛을 보다 - 지한재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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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합기도의 탄생 배경

지한재 선생의 한국 방문 세미나, 장소는 선문대학교
나는 민정당 창립 멤버로 합기도 유단자들을 민정당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을 하던 권정달씨는 안동중학교 1년 선후배사이였다. 그런데 민정당 국회의원들과 대통령 비서조직 간에 세력 다툼이 있었는데,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친 것이었다. 합기도 단체에 3,300만원을 쓴 것을 가지고 횡령 혐의로 몰아갔다. 당시 부회장을 하던 사람이 자기네 회사 돈을 이사의 동의 없이 합기도 협회에 썼다고 해서 1심에서 5년 구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항소를 했다.
그런데 2심에서 정만조 판사라는 분이 판결을 내리면서 하던 말이, “여보시오. 당신. 그렇게 눈치도 없소. 왜 자꾸 변호사 사고 그래. 식구들 못 살게. 열 달만 살고 나가”라고 하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잘못도 없는데, 왜 그래야 하나’ 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치적인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상고하지 않고 10달의 형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동안 수형생활을 한 게 있어서, 원주교도소에서 남은 형기 2달 반만 채우면 되었다. 2달 반 동안 조화를 만들면서 그 시기를 버티고, 출소를 했다. 그 때가 마흔 아홉이었다(이호성의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에서는 합기도 유단자를 민정당에 가입시켜 당 총재 경호에 투입하는 것이 계파 간에 물의를 빚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화랑도협회의 간부로부터 받은 경호비의 출처가 문제가 됐고, 회사 이사회의 동의 없이 지출됐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형무소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세검정 밖에 내 소유로 되어 있던 2층 양옥집도 변호사비 대느라 팔고 해서 살던 집도 없어졌으며, 협회도 배점만․김무홍․명재남 씨가 각기 자기 세력을 데리고 나가버려서 공중분해 상태였다. 그 당시 아파트 경비원 자리도 못 얻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대구 출신의 한얼교 교주인 신정일(申正一, 1938~1999)씨를 소개받아 그 밑에서 비서 겸 경호를 맡아 생활하게 되었다(정리자 주 : 한얼교는 단군을 받드는 종교로 1965년 신정일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그렇게 생활을 하던 중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인 메럴 정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그 사람은 다각도로 수소문을 하며 나를 찾았는데, 연락할 수가 없자, 국제전화를 걸어 전화를 연결해주는 교환원들에게 무작정 합기도의 그랜드마스터인 지한재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교환원 한 사람이 조선희 관장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내게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정리자 주 : 조선희 관장은 마포구 염리동에서 합기도 무심관을 운영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메럴 정이 자기 제자 7명을 데리고 우리나라로 와서 한 달간 수련을 받고 돌아갔다. 당시 한얼교 건물 안에 자그마한 도장을 하나 만들어 교주의 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메럴 정과 그의 제자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메럴 정은 수련이 끝나고 갔다.
그 후 독일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이 오펜바흐(Offenbach)에 있는 국제마셜아트슐레(국제무술학교)에 합기도 사범을 추천해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사정을 얘기하고 내가 가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받아들였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 전두환 씨의 동생 전경환 씨를 찾아가서 ‘내가 네 형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왔으니 나 외국에 내보내 줘’라고 해서 1년 짜리 문화여권을 그 자리에서 만들었고, 그 여권으로 독일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그 여성과 함께 1984년 1월 2일 우리나라를 떠났다.
영어는 띄엄띄엄이라도 하는데, 독일어는 전혀 하지 못했었다. 나를 초대한 측에서는 내게 50명의 수강생을 배정하고 수익의 60%를 주기로 했다. 그 돈은 식사비와 숙박비 그리고 300달러를 한국에 보내주면 더도 덜도 말고 딱 맞는 돈이었다. 그 무술학교에 합기도를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50명만을 배정할 뿐, 시간을 더 배정해 주거나 수련인원을 늘려주지는 않아, 섭섭하기도 했다.
처음 독일을 갈 때부터 메럴 정과 4월 1일부터 미국에서 세미나를 하기로 한 것을 나를 초청한 한국인 여자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날짜에 맞춰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세미나를 마치고 나니, 국내에 있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메럴 정에게 부탁을 해, 한국행 비행기표를 구입해 우리나라에 잠시 들어오게 되었다. 들어와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독일에서 부친 편지가 하나도 가족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일인과 결혼해 나를 데려간 한국여성이 내가 쓴 편지를 부치지 않고 중간에 폐기해 버린 것이었다. 다시 독일에 돌아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내게 도움을 줬던 메럴 정과는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84년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신무합기도’로 개명을 하였다. 신무의 신은 귀신 신(神)자의 고자를 사용한다. 현재 신무합기도는 60여 개 이상의 나라에 보급을 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합기도의 술기가 통일되고 단체의 통합도 함께 이루어져서 합기도가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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