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 최용술 선생과 결별하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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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와 나 - 지한재 편(5부)
최용술 선생이 내 가슴에 여러 번 못을 박았다. 한번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이사들이란 사람들을 끌고 와서 “지한재라는 자가 나한테 여덟 달 배웠는가?” 이런 식으로 나를 폄하하고 모욕을 주기도 했다.

최용술
5․16 군사혁명이 나고 화폐개혁이 있었다. 그 직후에 60만원, 지금 돈으로는 6억이 넘는 돈을 합기도 회관 짓는다고 내놓으라고 해서 드렸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20만원 내놓으라고 해서 박종규씨에게 얻어서 또 다시 드렸다. 그랬더니, 대구의 이권청탁 하는 사람들을 상당수 서울로 끌고 올라오셨다. 그곳에서는 최용술 선생이 박종규 씨하고 직접 연락이 된다해서 ‘대통력 빽이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런 소문을 듣고 이득을 노리는 사람들이 그 분을 앞세우고 서울로 올라와 면회를 신청했다. 박종규 씨가 나를 보더니, “지 사범, 왜 자꾸 영감 불러올리고 그래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요. 저는 안 불렀습니다”라고 했다. 그나마 박종규 씨가 나에게 운동을 배웠기 때문에 다른 부하들과는 관계가 달랐다. 박종규 씨가 “저 사람 면회 정지시켜”라고 해서 “면회 정지 시키십시오. 나는 안 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래가지고 박종규 씨가 면회실에다가 면회정지를 시키고 절대 얼씬도 못하게 내쫓아 버렸다. 그랬더니 최용술 선생의 원망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박종규 씨와 자신의 사이를 막았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1963년도에 안동 사범학교 미술 선생이자 최초의 안동 복싱 사범으로 있던 권장(權獎) 씨가 사범학교가 없어지자, 서울로 올라와서 내게 의탁했다. 이 분도 삼랑도 도맥을 조금 밟은 분이다. 나에게 이런저런 것도 가르쳐주고 의논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이론을 써서 우리나라에서 창안된 ‘기도(氣道)’를 국기로 제안하자고 해서, 김팔봉씨가 본부장을 맡은 국민운동본부와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나와 최용술 선생 그리고 권장 씨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창도한 ‘기도’를 국기로 제창한다는 서류를 만들어 보냈다.
‘기도’라는 명칭은 1962년에 처음 사용 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의 ‘아이끼도(合氣道)’ 책을 보고 같은 이름의 무예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최용술 선생은 자신이 하는 무술의 명칭을 ‘야와라’라고 말했다. 후에 서복섭 씨가 ‘유권술(柔拳術)’이라고 명칭을 제정했다가 다시 ‘합기유권술(合氣柔拳術)’로 바꾸었는데, 이 명칭은 내가 안동을 떠나 서울 마장동 시절까지 사용하다가 1957년부터는 ‘합기도(合氣道)’로 줄여 사용하였다. 처음 합기도로 줄였을 때는 일본의 ‘아이끼도’를 알지 못했다. 서복섭 씨가 합기유권술이라는 명칭을 어떻게 해서 제정하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5․16 이후에 일본과 교류를 하게 되면서 이름의 무예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합’자를 떼버리고 ‘기도’라고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기도를 최용술 선생에게 드려,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했는데, 당시 사범으로 있던 김정윤(金正允)씨가 나보다 늦게 입문했음에도 사범부장과 사단법인 이사직을 겸임하게 하고 나는 서울지부장으로만 해 놓았다. 너무 실망을 많이 한 그 때부터 나는 선생님과 결별하게 되었다. ‘기도’와 별도로 ‘합기도’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 후에도 1981년인가 내가 합기도를 통합시켜 회장을 할 때즈음 최용술 선생이 미국에 갔다. 당시는 외국 나가기가 힘들었던 터라 내가 문화부 등에 절차를 밟아서 나갈 수 있게끔 조치를 취했다. 나는 왜 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후에 미국에 들어가 보니까, 그 때 장진일이라는 사람에게 1억을 받고 도주 자리를 팔러 가신 거였다. 최대웅 씨 등이 “지한재 씨를 놔두고 영감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삿대질을 하기도 했다.
장진일 씨에게 도주 자리를 판 것이 내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더 이상 선생으로 모시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 때 내 제자인 오세림 씨가 염을하고 장지까지 다 챙겼다고 한다.
미국 교환 사범

고 최용술(오른쪽) 선생이 시연을 보이고 있다.
1967년 월남(베트남)에 태권도와는 별개로 시범단으로 참석했다. 최대훈 씨가 합기도협회장을 맡은 상황이었다. 한 두어 달 정도 돌아다녔는데, 우리나라 군부대나 미군 또한 월남군 특수부대 등을 방문해서 시연을 했다. 태권도 사범들을 좋게 보지 않고 시기를 했다. 그래서 우리가 격파할 나무를 최고로 단단하고 결이 없는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격파하기가 불가능한 나무였다. 정운선 씨가 결국 격파를 했지만, 뒤꿈치가 깨져버렸다. 사단장이 나무를 보더니 욕설과 함께 “누가 나무 가져왔어. 이걸 격파하러 내놨어. 니가 해봐”라고 하더니 그것으로 가져온 사람의 머리를 때리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1969년 닉슨대통령 시절 미국에 교환 사범으로 갔다. 청와대 경호실에 미국 공군 첩보단(OSI)에서 무선장비와 처음 나온 M16 소총을 경호장비로 지원해줬는데, 국내에서는 보답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하고 오세림, 김선근 씨를 보내서 미연방경찰(FBI), OSI, 닉슨대통령 경호원들을 가르치라고 보냈다. 그 때 후에 태권도협회장이 된 김운용 씨가 인솔자로, 임갑준 중령이 통역관으로 같이 갔었다. 내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대에 돌아가서 바로 활용을 해야 했다. 교육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해고를 해버렸다. 백악관에 들어가서 48명을 가르쳤다. OSI가 40명, FBI가 4명, 경호원들이 4명이었다.
팬타곤 들어가서 장성들 100명을 모아놓고 시연을 하는데, 장성들이 잘 논다는 식으로 보면서 껌도 씹고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이 사람들을 긴장을 시켜야지 하는 생각에 청소하는 사람을 불러냈다. 그러면서 청소부를 내가 죽였다 살리겠다고 했다. 장교 중에 병원 원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청소부의 심장을 마비시키면 얼마 만에 살릴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 병원 원장이 수술을 하면, 7~8시간 걸린다고 말을 했다. 나는 3초면 된다고 했더니 나는 못 믿는 다고 하면서 어이없어 했다. 순간적으로 청소부의 심장을 쳤다. 그 사람이 죽은 듯이 되자 병원 원장이 욕을 하면서 쳐다봤다. 내가 등을 치자, 그 사람이 거품을 내 뱉으면서 숨을 쉬고 걸어 나갔다. 장성들이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그 이후에는 신중하게 우리말을 들었다.
교환 교관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동경의 아이끼도 본관에 들렸다.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1883~1969)는 한 달 전에 죽었다고 하고, 아들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1921~1999)가 도복을 입고 가르치고 있었다. 서투른 일본말과 영어를 섞어가면서 합기도와 아이끼도 기법을 교환하자고 했다. 그런데 하와이 태평양 사령부 안에서도 시연을 할 때, 일본 아이끼도 사범이 합기도는 일본 것이라는 소리를 해서 혼을 내준 일이 있었다. 그 사범이 기쇼마루에게 전화를 해서 지한재와는 교류를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해서 무산되었다. 대신 명재남 씨를 데려가서 아이끼도 한국지부장 자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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